“이거 내가 안 하면 누가 해. 난 네 엄마니까.”
넷플릭스 시리즈 *‘폭싹 속았수다’*에서 염혜란이 연기한 전광례는 그렇게 말한다. 자식 앞에선 언제나 강한 척하는, 하지만 속은 늘 찢어지는 엄마. 애순이(아이유 분)의 삶이 지독히도 굴곡질 때, 그 뒤에는 늘 전광례가 있었다. 그리고 전광례를 연기한 염혜란이 있었다.
그녀는 단순히 ‘엄마 역할’을 연기한 것이 아니다. 그 시절 우리가 알았던 엄마들, 혹은 아직도 곁에 있는 어머니들의 얼굴을 그렸다. 지지리도 고단한 삶 속에서도 자식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 염혜란은 그것을 화려한 말 없이, 무심한 듯한 말투와 눈빛 하나로 설명해냈다.
1. 소리 없이 강한 배우, 염혜란
염혜란은 흔히 '신스틸러'로 불린다. 주인공은 아니지만, 그녀가 등장하면 시선은 그에게 향한다. 하지만 '폭싹 속았수다'에서는 단순히 조연 그 이상이었다. 그녀는 이야기의 뼈대를 형성하는 존재였다. 애순이의 삶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알려주는 핵심축이었고, 그 모든 감정의 뿌리였다.
전광례는 빚더미에 올라앉은 친정, 병든 전남편, 변변찮은 재혼남편, 그리고 자식. 인생이란 전쟁터 속에서 ‘그래도 내가 해야지’ 하며 온몸으로 버티는 인물이다. 그리고 염혜란은 그 전광례를 너무도 현실감 있게 그려냈다.
관객은 중간에 잊어버릴 수 없었다. 광례가 던진 짧은 대사 한 줄, 말없이 애순을 쳐다보는 그 눈빛은 보는 이의 심장을 움켜쥐었다. “염혜란 씨, 살살 좀 해 주세요.” 드라마를 본 시청자들이 SNS에 남긴 말이다. 감정을 너무 찔러대서, 가슴이 아프다는 뜻이었다.
2. 연기 인생 20년, 조연의 품격
염혜란은 2000년대 초반부터 연극 무대에서 단련된 배우다. 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를 졸업하고, 대학로에서 오랜 시간 무명을 견뎠다. 지금의 그녀를 있게 한 작품은 연극 ‘낙타상자’, ‘대학살의 신’ 등 무대 위에서 쌓은 내공이었다. 드라마에서 얼굴이 알려진 건 비교적 최근이다.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에서의 노규태 아내 ‘홍자영’으로 대중에게 확실한 인상을 남기고, 이후 ‘슬기로운 의사생활’, ‘경이로운 소문’ 시리즈를 통해 연기의 스펙트럼을 확장했다. 코믹부터 멜로, 스릴러까지 장르 불문, 배역 불문. 염혜란은 그 모든 역할에서 진심을 담았다.
그러나 그녀가 ‘폭싹 속았수다’에서 보여준 연기는 그중에서도 특별하다. 아픔이 축적된 감정, 그리고 그 감정이 말로 설명되기 이전의 찌릿한 진동. 그것을 연기할 수 있는 배우는 많지 않다. 염혜란은 자신의 인생과 경험을 캐릭터에 이입하며 전광례를 살아냈다.
3. 엄마이기에, 더 진하게
염혜란은 실제로도 한 아이의 엄마다. 결혼 후에도 연기를 놓지 않았고, 육아와 배우라는 정체성을 동시에 끌어안고 살아왔다. 그녀는 한 인터뷰에서 말했다. “아이가 없었으면 몰랐을 감정들이 있어요. 부모가 되어보니 ‘왜 그렇게까지 했을까’ 했던 어른들의 행동이 이제야 이해되죠.”
폭싹 속았수다의 전광례도 그렇다. 그녀는 뻔뻔한 것 같지만, 사실은 누구보다 깊은 사랑을 품고 있다. 자식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지만, 결국엔 그 자식이 잘 되길 바란다. 그것이 엄마다. 염혜란은 실제 자신의 엄마였고, 또 스스로 엄마가 되며 이해한 그 감정들을 꾹꾹 눌러 연기 속에 담았다.
그래서 전광례는 ‘역할’이 아니라, 우리의 과거이자 현재이며 어쩌면 미래다.
4. 빛나는 뒤안길, 그러나 중심으로
‘폭싹 속았수다’가 흥행하면서 주목받는 배우는 아이유와 박보검이었다. 물론 그들은 주인공이었고, 훌륭한 연기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작품의 깊이를 더한 것은 조연진, 그중에서도 염혜란이었다. 주연을 받쳐주는 조연이 아니라, 이야기를 끌어가는 또 다른 중심이었다.
염혜란은 여전히 자신을 ‘배우로 성장하는 중’이라고 말한다. 자신보다 빛나는 이들을 응원하면서도,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채워간다. 그 뿌리 깊은 성실함이 결국 지금의 염혜란을 만들었다.
그리고, 우리는 안다
염혜란이라는 이름은 누군가의 인생을 대변할 수 있는 배우라는 뜻이다. 어머니, 아내, 친구, 이웃... 그녀가 연기하는 인물은 누군가의 삶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만 같다.
그래서 우리는 다음 작품에서도 그녀를 기다린다. 그 진짜 같은 눈빛과, 담백하지만 깊은 연기, 그리고 ‘엄마’라는 말보다 더 따뜻한 무언가를 품은 사람.
“사랑해, 애순아.”
그 한마디에, 이미 우리는 눈물이 난다.